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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주요사건(광주학생항일운동, 신간회조직,국가총동원법 등)

by glory20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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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제강점기 주요사건(광주학생항일운동, 신간회조직, 국가총동원법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1월 3일에 시작된 한국의 항일운동 중 하나로, 학생들이 주도한 반일 시위입니다. 이 운동은 광주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우선 운동의 발단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한국인 남학생이 이를 저지하려다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인 학생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고,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주로 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거리로 나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의했습니다. 경찰은 강경하게 진압에 나섰고,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한국의 학생들이 주도한 최초의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학생들의 사회적 역할과 저항의식이 한층 더 강화되었고, 전국적인 항일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2. 신간회조직 

신간회는 1927년에 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좌우익 세력이 연합하여 조직된 최초의 통일전선체입니다. 이 단체는 민족 해방과 사회적 개혁을 목표로 활동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국 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정치세력이 각각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좌우익 세력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간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일제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가장 열악했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년,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내부 분열로 인해 신간회는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은 이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항일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은 일본 제국이 1938년 제정한 법으로, 중일전쟁(1937년)과 제2차 세계대전(1939년)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 법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특히 조선(한국)과 대만에서도 강력하게 시행되었습니다. 당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어린이까지도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조선인 남성들은 군인으로 징병되거나 군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식량, 금속, 석탄 등의 물자가 전쟁을 위해 강제로 징발되었습니다. 조선의 농민들은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으며, 철과 같은 금속 자원도 강제로 수탈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경제 전반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가했는데 가격 통제, 물자 배급제 등이 시행되어 조선인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당시 국가총동원법의 시행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 징병, 노동력 동원 등의 형태로 고통받았습니다. 이는 조선인들의 일상 생활을 파괴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을 크게 증대시켰습니다. 

 

4. 이봉창의거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은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척한 의열 투쟁가로서 이봉창 의거는 1932년 1월 8일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이봉창은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김구 선생의 지도 아래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의 사쿠라다문 앞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마차 행렬을 겨냥해 폭탄을 던졌으나, 천황의 마차는 손상되지 않고 뒤따르던 마차가 파손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10일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봉창의 의거는 일본 천황을 겨냥한 최초의 공개적인 저항으로, 일제의 심장부에서 이루어진 과감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후 윤봉길 의거와 같은 의열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5. 윤봉길 의거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군경 및 주요 인사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윤봉길 의거는 1932년 4월 29일에 발생했습니다. 당시 윤봉길은 농민 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지도 아래 폭탄 투척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상하이 점령 기념 및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윤봉길은 이 행사에서 도시락 폭탄과 물병 폭탄을 사용하여 일본군 주요 인사들을 공격했습니다. 이 폭탄으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츠구 등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윤봉길 의거는 일제의 주요 인사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전 세계에 한국 독립운동의 의지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장제스(장개석) 총통은 윤봉길 의거를 높이 평가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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