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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인조반정,정묘호란,영정법,병자호란 등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glory20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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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시대 일어난 주요 사건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 기해예송, 갑인예송의 발생배경과 결과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조반정 (1623년) 

조선 선조 말년과 광해군 시대는 정치적 혼란이 컸던 시기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이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그의 정책과 왕권 강화 방식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펼치며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이는 대북(大北)파의 지지를 받아 진행된 정책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등 다른 파벌의 불만을 샀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압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특히,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유폐한 사건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광해군의 정책과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서인과 남인이 중심이 되어 반정을 계획했습니다. 이에 1623년, 서인과 남인 세력은 계획적으로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김류, 이귀, 이서 등이 주도한 이 반정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광해군은 폐위되었으며, 인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인조반정은 조선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광해군이 추진하던 중립 외교는 폐기되고, 명나라와의 관계가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반정 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새로운 정치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2. 정묘호란 (1627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후금(後金, 나중의 청나라)과는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후금은 조선의 명나라 지지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조선은 후금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후금은 빠르게 성장하며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조선이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자 후금은 이를 경계했습니다.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무시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침공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1627년,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조선은 급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후금의 기세에 밀려 강화를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정묘호란의 결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일정한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했습니다. 이는 후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3. 병자호란(1636년)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년) 후금(後金, 나중의 청나라)이 조선을 침공한 전쟁입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로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후금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조선이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고 명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자, 후금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후금과의 관계 개선을 소홀히 하고 명나라를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636년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조선은 급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청군의 빠른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습니다. 인조는 한양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청군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성내의 군사와 식량은 부족했고, 청군의 포위망은 점점 더 조여왔습니다. 1637년 1월, 인조는 결국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항복의 예로써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예를 행했습니다.

 

4. 영정법 (1644년)

영정법은 조선 인조 22년(1644년)에 시행된 조세 제도로, 임진왜란 이후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 법은 전세(田稅)를 개편하여 농민들에게 보다 공정한 세금 부담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조세 제도는 풍흉(풍작과 흉작)에 따라 세금이 변동되었으나, 영정법은 이를 고정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각 필지의 토지에 대해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토지 1결(결은 토지의 면적 단위)당 4두(말)의 세금을 부과하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는 흉작 시에도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영정법은 농민들에게 직접 부과되는 세금 외에도, 지방 관리들이 부과하는 간접 세금을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부당한 세금 징수를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영정법은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실제 시행 과정에서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가 발생해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세 제도의 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5. 기해예송(1659년)

효종이 1659년(기해년)에 사망하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인조의 계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아들이자 조씨의 의붓아들이었으므로,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에 대해 논란이 생긴 것입니다. 서인은 자의대비가 효종에게 법적으로 어머니가 아니므로, 상복을 1년(기년복)만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반면 남인은 효종이 비록 의붓아들이지만, 실질적으로 자의대비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3년(삼년복)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경(禮經)을 근거로 했습니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서인의 승리로 끝났으며, 서인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 갑인예송(1674년)

1674년(갑인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한번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서인의 결정을 뒤집으려 했습니다. 서인은 자의대비가 인선왕후에게는 법적으로 시어머니가 아니므로,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남인은 자의대비가 인선왕후에게는 실질적으로 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자의대비가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남인의 승리로 끝났으며, 남인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은 표면적으로는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서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송 논쟁은 조선의 사상적, 정치적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17세기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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