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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by glory20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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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 후기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그리고 개항기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의 주요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유박해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는 조선 후기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 중 하나로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서양 세력의 침입으로 인식하여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천주교가 조선 사회의 유교적 가치와 충돌하여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특히 정조 사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함께 서학(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습니다. 이시기에 정약용, 이승훈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는데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 사건' 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탄압의 시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지만, 천주교는 이후에도 은밀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신유박해는 조선 사회 내 종교적 갈등과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홍경래가 주도한 사건입니다. 탐관오리의 착취 등 지방 차별과 경제적 불만, 세도 정치의 부패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 시기 평안도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불만이 극대화되면서 반란이 촉발되었는데 조선 정부의 세도 정치와 부패로 인해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홍경래와 그의 동지들이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 지역을 장악했고, 반란군은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관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관군의 반격으로 반란은 1년 만에 진압되었으며, 홍경래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불안정과 민중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3. 임술농민봉기 

1862년(철종 13년)에 경상남도 진주를 중심으로 발생한 농민 반란입니다.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혼란과 농민들의 불만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시기 세도 정치와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농민들의 생활고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는데 특히 과도한 세금과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이 농민들을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진주 지역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유계춘 등의 지도자들이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삼정을 개혁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봉기는 이후 동학농민운동 등 다른 농민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4.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집권 (1863년)

1863년, 헌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고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하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삼정 개혁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재정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5. 병인박해 (1866년)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면서 서학(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서양의 침략 도구로 인식하고 강력한 탄압을 단행했습니다. 이에 1866년,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병인박해는 프랑스와의 외교적 갈등을 초래하며, 이후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6. 병인양요(1866년)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가 금지되어 있었고, 병인박해(1866년)로 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군은 1866년 9월 강화도에 상륙해 조선군과 교전했습니다. 특히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강화도를 되찾았습니다. 프랑스군은 결국 철수했지만, 조선의 폐쇄적인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7. 신미양요(1871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에서 미국 상선이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조선과 통상을 개시하려 했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1871년 5월, 미국군은 강화도에 상륙해 조선군과 충돌했습니다. 미국군은 초지진과 광성보를 점령했지만, 조선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이에  미국군은 최종적으로 철수했으며, 조선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8. 운요호 사건(1875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하며 조선과의 교역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일본은 군사적 압박을 통해 문호 개방을 시도했습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연안에 접근하여 포격을 가했고, 이에 조선군이 대응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조선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하게 됩니다.

 

9. 강화도조약(1876년)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힘을 배경으로 조선을 압박했습니다. 조약은 조선이 일본에게 3개의 항구(부산, 원산, 인천)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은 일본인을 재판할 권리를 포기하며, 일본은 영사 재판권을 획득했습니다. 결국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근대적 외교의 시작을 알렸으나, 동시에 일본의 침략 야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기인 1894년에 발생한 대규모 농민 봉기로,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한 관리에 대한 반발,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결합된 사건입니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졌습니다. 임술농민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특히 이시기 자연재해로 많은 고통이 있었는데 소작농과 자영농의 경제적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때 동학이 창시가 되어 최제우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동학은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을 띠며,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제1차 봉기가 1894년 3월 전개되었습니다. 이때 전라북도 고부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했고 농민들은 백산(白山)에 집결하여 농민군을 조직하고, 반봉건적 요구와 함께 반외세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고부 농민봉기는 안핵사 이용태의 무리한 진압 시도로 인해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이 재차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 봉기는 1894년 9월에 전개되었는데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재차 봉기했습니다. 농민군은 남접(전봉준)과 북접(손병희)으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전라북도와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여 북상,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대치했으나 결국 농민군은 패배하였고,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정부의 개혁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강하게 촉구하는 영향을 미쳤고 농민들의 요구로 인해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근대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은 농민들이 주도한 최초의 대규모 봉기로, 민중의 사회적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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