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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개항기시대의 주요 사건 정리(독립신문, 대한제국, 을사늑약, 헤이그특사 등)

by glory20 2024.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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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시대의 주요사건들에 대해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독립신문발간 및 독립협회 설립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근대화와 자주 독립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언론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서재필(필립 제이슨)은 미국에서의 유학과 활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의 발간을 준비했습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었는데 이는 조선 최초의 한글 신문으로, 한글과 영어로 발행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국민 계몽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사를 실었으며, 서구 문물과 정치 제도를 소개하여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정부와 관료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민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독립신문의 발간과 함께 서재필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습니다. 이에 따라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삼고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독립협회는 다양한 계몽 활동을 전개했으며, 국민들에게 근대적 사고와 자주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또한,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로 1898년에 열린 만민공동회가 있습니다. 이는 서울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 형식으로 열렸으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요구를 표출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민권 신장과 자주독립을 외쳤으며, 이를 통해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은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고,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독립협회는 1899년에 해산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립신문은 1899년까지 발행되었으며,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신문의 정신을 계승하여 언론 활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2. 대한제국 선포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등의 국제적 사건은 동아시아의 권력 구도를 급격히 변화시켰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은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1896년)을 단행하게 됩니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고, 이를 통해 독립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고,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선포를 준비했습니다. 고종은 자주독립을 표방하며, 조선의 국호를 변경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신정부 조직 개편, 국기(태극기) 제정, 연호(광무) 제정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했습니다. 이 날을 기해 조선은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황제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을 표방했으나,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 등의 열강의 간섭과 압박은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는 이후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습니다.

 

3. 을사늑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1905)을 통해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고종 황제의 지휘 아래 자주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열강의 압력과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외교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으나, 일본은 무력과 압박을 통해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경운궁(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강제로 모아 을사늑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불리는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 등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끝까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강압으로 인해 조약은 체결되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과 외교를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 내에서는 강력한 반발과 함께 민중들의 독립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해외에 특사를 파견하고, 헤이그 특사 사건(1907)을 일으켰습니다. 을사늑약은 한일 병합(1910)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일본은 점차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고,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습니다.

 

4. 헤이그 특사파견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습니다. 이는 국제법상 부당한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이를 무효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는 일본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외교적 지원을 받아내고,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임명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습니다. 이준은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제국의 독립과 자주권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한 이상설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활동에 능통했습니다. 드디어 1907년 6월, 특사들은 헤이그로 향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인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정식으로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특사들은 각국 대표들을 만나 대한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본의 부당한 행동을 알렸습니다. 당시 헤이그 특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대한제국을 돕지 못했습니다. 당시 열강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대한제국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결국 1907년 7월 고종은 강제로 퇴위하게 되었고, 순종이 황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비록 국제사회의 직접적인 지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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