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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개항기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by glory20 202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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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개항기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3.1운동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은 한국인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결국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억압으로 인해 한국인의 불만과 저항 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비밀결사와 학생운동, 종교단체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려운시기 였지만, 해외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국제적인 지원을 모색했습니다. 특히,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의 계기로 삼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란 민족이 외부 간섭 없이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말합니다.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14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는 전후 세계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14개 조항 중에서 민족자결주의는 여러 항목에 걸쳐 언급되며, 식민지 민족과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특히 패전국의 영토 재조정 시에도 민족의 자결 원칙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민족자결주의는 많은 식민지 국가와 민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한국, 인도, 베트남 등 많은 국가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다시 3.1운동의 본론으로 돌아가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학생, 농민, 상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군대는 이를 강제로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3.1 운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국, 중국 등 해외에서도 지지와 동참을 받았습니다. 해외 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비록 독립을 즉시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식민통치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변경하며, 표면적으로는 유화책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인들을 분열시키고,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3.1 운동은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무장 투쟁과 외교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지속되었습니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년 3.1 운동은 전 국민적인 독립 열망을 폭발시켰고,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따라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사실 3.1 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임시정부 수립 시도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만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회가 임시정부를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들이다보니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하나로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 4월,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민주 공화제를 표방하며,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국무총리로 이동휘가 선출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고, 지원을 받기 위해 외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김규식, 여운형 등은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받기 위해 외교 노력을 지속했습니다. 외교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는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군을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무장 투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노선 차이로 인해 여러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간의 갈등, 외교 노선과 무장 투쟁 노선 간의 대립 등이 주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갈등과정을 극복하면서,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조국의 해방을 맞아 귀환하였으나, 미군정의 승인 문제로 인해 즉각적인 권력 이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여러과정을 거쳐 임시정부의 주요인사 특히 김구가 귀환을 하였고 해방후 어지럽던 민중과 분위기를 하나로 화합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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