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개항기의 주요사건인 임오군란, 조미수호 통상 조약체결,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에 대해서 시간순서 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임오군란 (1882년)
임오군란은 1882년 조선에서 발생한 군사 반란으로, 조선의 군인들이 임금 미지급 및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전개된 과정을 보면 1882년 6월, 임금이 미지급된 군인들이 우두머리인 흥선대원군의 지지 아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은 한성(서울)으로 진격하여 정부 고관들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습니다. 당시의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는 도망치지 못하고 체포되어 폭행을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더욱 깊이 간섭하게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가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2.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2년)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첫 번째 조약으로, 양국 간의 우호와 통상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조선과 미국의 상호 통상 및 거주, 치외법권 인정,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인해 조선은 본격적으로 서양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도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양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압박도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3. 갑신정변 (1884년)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개화파는 고종을 협박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정치 개혁, 신분 제도 철폐, 재정 개혁 등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한성으로 진격하여 개화파를 진압했습니다. 주요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개화파는 큰 타격을 입었고, 조선은 다시 청나라의 간섭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갑오개혁 등의 개화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 갑오개혁 (1894~1896년)
갑오개혁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진행된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가 주도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 내외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은 1894년 시작되었는데 과거 제도 폐지, 의정부와 8도 체제 개편, 왕권 약화 및 내각 중심의 정치 체제 수립, 신분 제도 폐지, 노비 제도 철폐, 조혼 금지, 과부 재혼 허용, 은본위제 채택, 조세 제도의 개선, 화폐 제도 개편을 요구하게 됩니다. 2차 갑오개혁은 1895년에 전개되었느데 내각제 강화, 행정 구역 개편, 지방 자치제 도입, 교육 제도의 개혁, 근대식 학교 설립, 상공업 진흥, 토지 세제 개편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은 조선 사회를 근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과 일본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개혁의 일부는 지속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5. 을미사변 (1895년)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일본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명성황후는 친러시아 정책을 추진하며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도 아래, 일본군과 조선 내 친일 세력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태워져 그 흔적을 감추려 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왕실과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 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으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아관파천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게 됩니다.
6. 청일전쟁 (1894~1895년)
청일전쟁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이 이를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투의 본격적인 시작은 1894년 7월 25일, 풍도 해전에서 일본이 청나라 해군을 격파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94년 9월, 일본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이어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본토로 진격했습니다. 성천 전투,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등에서 일본이 연이어 승리했습니다. 이어 1895년 1월, 일본군은 청나라의 주요 군사 기지인 여순을 점령했습니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했습니다. 이로써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타이완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7. 아관파천 (1896년)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과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고종과 왕세자(훗날의 순종)는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중심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졌으며, 러시아는 조선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외세의 간섭이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친러시아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다시 일본과의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자주적 개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외세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하려는 고종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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