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고려시대의 주요사건 정리 (후삼국통일, 노비안검법, 서희강동6주 등)

by glory20 2024. 7. 3.
반응형

오늘은 고려시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

(1) 왕건의 고려 건국
왕건은 918년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는 태조로 즉위하며 수도를 송악(현재의 개성)으로 정하고 고려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목표로, 고구려의 후예로서 통일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각지의 호족들과 연합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2) 후삼국 통일 과정
후삼국 시대는 후백제, 후고구려(태봉), 그리고 신라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는 이 중 신라와 동맹을 맺어 후백제와 대립하였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패하여 고려로 망명하면서 후백제는 붕괴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신검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2. 고려 시대 왕들의 개혁과 업적

(1) 광종의 즉위
광종(재위 949-975)은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고려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광종은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 노비안검법
노비안검법은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해방시키는 법으로,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 과거제 도입
광종은 과거제를 도입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관료 체계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중앙 정부의 행정력을 강화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2) 경종의 통치
경종(재위 975-981)은 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고 정치적 기반이 약하여 왕권이 불안정하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내정은 혼란스러웠습니다.

 

(3) 성종의 개혁
성종(재위 981-997)은 경종의 동생으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성종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고, 전국적인 행정구역을 정비하였습니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또한, 성종은 국자감(국립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유교 교육을 장려하였습니다.

 

3. 서희의 외교
서희는 고려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거란(요)과의 외교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는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지금의 평안북도 의주 지역)를 확보하였습니다. 강동 6주를 확보함으로써 고려는 국경을 안정시키고, 북방의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란과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안정되었고, 고려는 내부 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4. 귀주대첩

귀주대첩은 1019년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낸 전투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거란은 고려를 압박하며 여러 차례 침입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강감찬은 귀주(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에서 거란군을 매복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대규모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로 고려를 직접적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군사적 역량을 증명하였고,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고려의 국경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5. 윤관의 여진 정벌

여진족은 12세기 초 고려 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며 침입을 일삼았습니다. 윤관은 1104년부터 1109년까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이 성은 고려의 북방 방어선을 강화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진 정벌을 통해 고려는 북방의 안정과 국경을 확립할 수 있었으며, 이후 여진족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9성은 결국 여진족에게 반환되었습니다.

 

6. 윤자겸의 난

윤자겸은 문벌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인종(재위 1122-1146) 시기에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종을 압박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윤자겸의 권력 남용과 횡포에 반발한 김부식 등 일부 관리들은 1126년 윤자겸을 제거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윤자겸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윤자겸의 난은 고려 중기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후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7.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12세기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운동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려는 문벌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중앙 정부는 이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묘청은 승려 출신의 인물로, 서경(지금의 평양)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서경이 고려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신라의 고도 경주를 지키려는 개경파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서경파는 서경이 고구려의 옛 땅이자,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며 천도를 주장했습니다. 묘청과 그의 지지자들은 서경 천도를 통해 국운을 일신하고, 외세(특히 거란과 금)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서경 천도를 통해 문벌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중앙 권력을 확립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경 천도 문제는 고려 내부에서 큰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기존 문벌귀족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개경파는 수도 이전에 반대하며, 현 체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서경 천도 운동은 결국 1135년에 묘청의 난으로 발전했습니다. 묘청과 서경파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정부를 세우려 하였으나, 이는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한 인물로,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개경파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묘청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은 고려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고려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드러냈으며, 문벌귀족의 권력 독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묘청의 난은 고려의 외교 및 군사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고려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취하게 되었으며, 내정에서도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8.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김부식은 고려 인종 시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1145년경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 김부식은 역사서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기(本紀), 열전(列傳), 지(志), 연표(年表) 등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 정사(正史) 형식을 본받아 편찬되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며, 왕권 강화와 유교 이념을 반영한 사서입니다. 이는 고려 초기에 기록된 《삼국유사》와 대비됩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의 역사 인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9. 고려의 무신정변

12세기 중반 고려는 문신 중심의 정치 구조로 인해 무신들이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무신정변의 배경이 마련되었습니다. 특히 의종의 사치와 문신들의 전횡이 무신들의 불만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1170년, 무신 정중부와 이의방이 주도하여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중부는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즉위시켜 무신 정권을 확립했습니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는 무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혼란과 농민 봉기를 초래했습니다. 무신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며 정권이 불안정해졌고, 이는 고려의 중기 정치 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0.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아시아 전역을 정복하며 고려에도 침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231년 몽골의 첫 침입이 시작되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침입이 계속되었습니다. 몽골군은 고려의 주요 도시와 군사 요충지를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였습니다. 이는 몽골군의 해상 공격을 피하고, 장기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로서, 몽골의 육상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강화도는 고려의 임시 수도로서, 몽골과의 장기전에 대비한 방어 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며 국력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천도는 일부 민심 이반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11. 개경 환도

강화도에서 오랜 저항 끝에, 1259년 고려와 몽골은 강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몽골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70년 고려는 정식으로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 이는 몽골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개경 환도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으며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했습니다.

 

12. 홍건적의 난

14세기 중반 중국에서 원나라의 통치에 반발하여 홍건적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세력을 확장하였고, 1359년과 1361년에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홍건적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의 수도 개경을 공격하였습니다. 첫 번째 침입 때는 개경을 일시 점령하였으나, 고려군에 의해 퇴각하였습니다. 두 번째 침입 때는 다시 개경을 점령하고 많은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최영, 이성계 등의 장군들이 활약하였습니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 때 최영과 이성계는 개경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홍건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홍건적의 난은 고려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였으며, 군사적 위기의식을 고조시켰습니다. 이는 고려 말 정치 개혁과 군사 개편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응형